「건축 생산 역사」(박인석) 中 발췌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 건축은 고전주의시대 이래 최초이자 유일하게 구속력 있는 양식을 일상의 삶의 형태까지도 규정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양식을 남겨 놓았다.”라는 하버마스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든 해체주의든 반모던 가치를 내건 건축들은 모더니즘 형태 규범을 흐트러트리기는 했지만 현대 건축 생산에서 주류가 되지 못한 채 일부 경향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모더니즘 건축을 비판하는 담론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하버마스의 항변 역시 귀담을 만하다. 그는 「근대 그리고 탈근대 건축」(1981)에서 모더니즘 건축의 실패는 건축의 과오라기보다는 근대 사회의 체계와 생활세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엄청나게 확장된 근대 사회에 합리적으로 대응한, 또는 대응하려 한 분야가 건축 이외에 또 있었는가? 그렇다면 근대 건축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건축만이 근대 사회의 향방을 떠안으려 시도했을 뿐이다. 누구든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과제에 도전한 것을 두고 ‘실패’라고 할 수 있는가?
삶의 형태를 예견했던 유토피아는 실제의 삶으로 실현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의 생활세계가 갖는 복잡성과 변화 가능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근대화된 사회가 그 체계의 상호관계들과 함께 계획가들이 상상력으로 측정할 수 있는 생활세계의 차원을 넘어 확장되었다는 사실에도 기인한 것이다. 근대 건축의 위기에 대한 현재의 선언은 건축 자체의 위기보다는 오히려 건축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과중한 짐을 떠안았다는 사실로부터 연유했다…. 근대 건축의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들의 실패는 도시 생활체계가 점점 ‘형태를 부여할 수 없는 체계의 관계들’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을 예증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주택 프로젝트나 공장들을 도시에 통합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져버린 것이다. 도시는 우리가 심정적으로 갖고 있던 오래된 도시 개념을 넘어서버릴 정도로 커져버렸다. 그러니 이것은 근대 건축의 실패도 아니고 다른 어떤 건축의 실패도 아니다.
르페브르의 공간 담론은 사회적 공간이 생산되는 세 가지 국면, 즉 ‘공간적 실행’, ‘공간의 재현’, ‘재현적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전개되며 공간계획으로서 건축의 사회적 실천 가능성을 시사한다.
‘공간적 실행’(spatial practice)은 일상생활, 즉 특정한 공간 형식들과 그 공간적 그물망 안에서 규범화되어 행해지는 일상적인 행위들을 말한다. 행위는 대부분 ‘규범화’되기 마련인데, 일상생활이 사회적으로 규범화(코드화)된 시설들(학교, 공장, 시장 등)과의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설들과 관계망의 규범은 해당 사회의 문화(역사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반영으로서의)와 정치경제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공간의 재현’(representations of space)은 도시계획, 건축설계 등 사회적 제도 속에서 진행되는 공간 생산 행위를 말한다. 공간에 대한 추상적 개념이나 이데올로기를 현실공간으로서 구체화하는 것으로서 일상생활을 일정 범주로 한정하려는 속성을 가지면서, 필연적으로 일상생활, 즉 ‘공간적 실행’과 충돌한다.
‘재현적 공간들’(representational spaces)은 규범화된 ‘공간적 실행’을 벗어난, 또는 ‘공간의 재현’과 충돌한 ‘공간적 실행’이 행해지는 공간들이다. 주어진 길, 주어진 방식을 거스른다는 의미에서 전형적인 탈주의 공간인 셈인데 바로 이것이 르페브르의 공간 생산론이 정치적 실천론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김남주, 「차이의 공간을 꿈꾸며:『공간의 생산』과 실천」, 『공간과 사회』 제14호 (한국공간환경학회, 2000), 71쪽.)